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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계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앞둔...조선왕릉이야기(5)
고려 왕릉이야기-2(고려왕릉의 분포와 특징)
기사입력: 2018/09/04 [02:18]  최종편집: ⓒ 경기인터넷뉴스
한철수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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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왕릉 이야기...강화도 21대 희종의 석릉     © 한철수

 

-초기 4대 왕릉 도성 4방위에 배치...태조의 현릉 서쪽에 두어

 

고려의 왕릉은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87기라고 한다. 하지만 석물의 배치, 출토유물 등 왕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는 왕릉은 58기 정도이고 능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능은 31기에 불과하다. 일제에 의해 국권수탈기인 1916년에 작성된 <고려제릉묘제조사보고서>에는 53기의 고려왕릉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고종이 세운 능표(표석)를 기준으로 했다.

 

고려왕릉 분포에 있어 독특한 특징이 보인다. 1대 태조의 현릉(顯陵)은 서쪽에 제2대 혜종의 순릉(順陵)은 동쪽에 제3대 정종의 안릉(安陵)은 남쪽에 제4대 광종의 헌릉(獻陵)은 북쪽에 두었다. 1대부터 4대까지 도성(개성)의 동서남북 4방위를 둘러싼 것이다. 4방위는 사신(四神)을 의미한다. 고려 초기 왕릉을 사신사로 배치하므로 개국 초기 왕들을 신성시하려는 의도와 도성을 보호하려는 풍수적 이유가 숨어 있다.

 

 

▲ 태조 왕건과 선혜태후의 현릉     © 국립문화재연구소


 

또한 태조의 현릉을 서쪽에 배치한 것은 고려가 불교국가이므로 서방정토(西方淨土)라는 불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고려왕릉은 서쪽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5-1 참조>

 

위치(개성)

묘호(능호)

서쪽(20)

태조(현릉), 대종(태릉), 현종(선릉. 선릉떼1), 선릉떼2~3, 칠릉떼1~7, 충목왕(명릉. 명릉떼1), 명릉떼2~3, 제국대장공주(고릉), 서구릉, 공민왕(현릉), 노국대장공주(정릉), 세조(창릉)

동쪽(11)

혜종(순릉), 동구릉, 화곡릉, 숙종(영릉), 문종(경릉), 명종(지릉), 강종(후릉), 안종(건릉), 헌종후(원릉), 고읍리1~2

남쪽(10)

정종(안릉), 신종(양릉), 예종(유릉), 충정왕(총릉), 성종(강릉), 경종(영릉), 순종(성릉),신성후(정릉), 수락동벽화분, 법당방벽화분

북쪽(12)

광종(헌릉), 온혜릉, 원종(소릉. 소릉떼1), 소릉떼2~5, 냉전동1~3, 월로동1~2

강화도(5)

고종(홍릉), 희종(석릉), 원덕후(곤릉), 순경후(가릉), 능내리석실분

 

<5-1. 고려왕릉 분포현황. 고려왕릉 현황과 구조적 특징(이상준. 세계유산 조선왕릉과 동아시 황릉. 2016.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

 

또한,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작제건)와 할머니(용녀)의 온혜릉과 제2대 혜종의 순릉은 도성 안에 있는데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조선시대에는 볼 수 없는 배치다.

  

-고려왕릉 위숙군이 관리...조선 고려왕릉도 관리

 

왕릉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성한 곳이다.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기에 고려왕릉에는 위숙군(衛宿軍)을 두어 관리했다. <고려사> 병조 위숙군 조에 나타난 왕릉은 59기이고, 고려의 위숙군은 산직장상(散職將相)으로 2, 4, 6명을 두었다. 이 기록은 고려 제17대 인종 이전의 왕릉으로 능의 주인이 확인 된 곳은 37기이다.<5-2 참조> 

 

위숙군

능호(陵號)

2

(47)

심릉(沈陵), 양릉(良陵), 수릉(壽陵), 선릉(宣陵), 제릉(濟陵), 회릉(懷陵), 명릉(明陵), 은릉(隱陵), 덕릉(德陵), 정릉(貞陵), 제릉(齊陵), 질릉(質陵), 의릉(宜陵), 영릉(永陵), 정릉(定陵), 풍릉(豊陵), 성릉(成陵), 자릉(慈陵), 목릉(穆陵), 대릉(戴陵), 창릉(昌陵), 영릉(寧陵), 공릉(恭陵), 단릉(端陵), 장릉(莊陵), 현릉(玄陵), 이릉(夷陵), 유릉(幽陵), 원릉(元陵), 인릉(仁陵), 익릉(翼陵), 혜릉(惠陵), 견릉(堅陵), 평릉(平陵), 건릉(乾陵), 숭릉(崇陵), 영릉(靈陵), 용릉(容陵), 화릉(和陵), 절릉(節陵), 도릉(悼陵), 신릉(信陵), 정릉(靜陵), 광릉(匡陵), 간릉(簡陵), 숙릉(肅陵), 주릉(周陵)

4

(10)

헌릉(憲陵), 순릉(順陵), 의릉(義陵), 경릉(景陵), 현릉(顯陵), 영릉(英陵), 강릉(康陵), 안릉(安陵), 영릉(榮陵), 태릉(泰陵)

6

(2)

유릉(裕陵), 수릉(綏陵)

 

<5-2> 고려시대 능을 지키던 위숙군(북역 고려사. 북한사회과학원 고전연구소 편찬)

 

2명의 위숙군을 둔 왕릉은 16대 예종 이전의 왕후릉(5-2. 밑줄)과 아홉 왕릉이다. 4명을 둔 곳은 태조의 현릉(顯陵)부터 7대 목종의 의릉(義陵)까지와 11대 문종의 경릉(景陵)15대 숙종 영릉(英陵)이다.

 

6명의 관리자를 둔 왕릉은 17대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의 유릉과 어머니 순덕후의 수릉(綏陵)이다. 4인과 6인을 둔 왕릉 중 <문종(경릉)-숙종(영릉)-예종(유릉)>으로 이어진  삼종(三宗) 직계존속으로 고려초 일곱 왕과 동일선상으로 본 것이다.

 

59기 중 26대 충선왕의 덕릉(德陵)28대 충혜왕의 영릉(永陵)이 있다.(5-2. 밤색이는 인종이후 충렬왕까지 200여 년 간 관리자를 두었다는 기록이 없어 충혜왕 이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릉과 정릉     © 국립문화재연구소

 

 

태조의 현릉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관인 재궁(梓宮)을 옮겨 다녔다. 8대 현종 원년(1010)9년 거란의 침입으로 북한산(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복릉(復陵)했다. 고종 19(1232)에는 추존 세조의 창릉과 태조의 현릉을 강화로 천도하면서 새로이 만들었다. 원종11년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태조의 묘(.사당)를 짓는 것에 그쳤고, 충렬왕 2년에서야 세조와 태조의 능을 원위치 했다.

 

고려왕릉은 인종까지는 체계적으로 관리가 되었으나 이후 외침과 내란으로 고려 후기에 들어 많은 능이 파괴되고 도굴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고려왕릉에 대한 관심이 가졌다. 태종은 태조 현릉에 속군를 두었고, 세종은 쇠락한 왕릉을 수리하고 벌목과 경작을 금하고 수릉(守陵) 8호를 두었다.

 

 

▲ 1920년대 왕건릉     © 문화재청

 

 

현종은 백성에게 덕을 베푼 고려의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은 공이 많다하여 숭의전에 위폐를 모시고 제향을 올렸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43기를 고치게 했다. 금표(禁表)를 세워 일정 구역에 무덤을 쓰거나 경작을 못하도록 했으며, 3년에 한 번씩 능을 돌아보고 보고하도록 했다. 순조는 능호와 소재가 확실한 30기의 능에 능표(陵表)를 세웠고, 나머지 능에는 번호를 매겨 보전했다.

 

고종은 57기의 왕릉을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고 모두에 표석을 세웠으며 이를 태조의 현릉 앞에 세운 <고려현릉개수실기비>에 새겼다고 한다.

 

-1916년부터 고고학적 연구시작 ... 개성주변 다섯 능은 세계유산에 포함

 

고려왕릉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국권상실기(일제강점기)1916년으로 올라간다. 당시 경성제국대학교 교수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고려사> 위숙군 조를 따라 소재지가 분명한 능, 소재지가 불확실한 능, 실명왕릉 등으로 구분을 했다. 명종의 지릉과 칠릉떼를 발굴했으며, 고려왕릉의 내부를 처음 세상에 알렸다.

 

해방 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와 개성역사박물관에서 1956년부터 1998년까지 20차례이상 발굴조사를 했다. 2016년 6월 289대 덕종과 10대 정종이 묻힌 숙릉과 주릉이 발견되었다고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는 밝혔다.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무덤의 외부 건축 양식이 고려 태조 왕건 왕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으로 그동안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고려사> 등 옛 문헌 기록에 기초해 확인했다고 전했다. (5-2. 빨간색)

 

 

▲ 북한의 세계문화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 분포도     © 한철수


 

남한은 13종목의 세계유산을 북한은 고구려고분군(2004)과 개성역사유적지구(2013) 2종목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10세기~14세기 475년 동안 지속된 고려의 도읍지 개성에 분포된 12개의 개별 유적을 하나로 묶었다.

 

 

▲ 북한의 세계문화유산...개성을 둘러싼 발어참성(拔禦塹城.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9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개의 개별 유산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개성성벽으로 부르는 <발어참성(拔禦塹城.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9)> 5구역으로 175.8ha(53만평)에 달한다. 발어참성은 송악산·부흥산·도강봉·용수산·지네산 등을 연결 개성을 보호하는 내성으로 고려 왕조가 아직 세워지기 전부터 조선 개국 2년간(1391~1393) 증축과 보수를 했다.

 

 7가지 개별유산은 만월대 궁궐터 천문기상관측소인 개성첨성대 개성 내성 남문인 남대문 고려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 정몽주 집터에 세운 유교교육기관 숭양서원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와 표충사 고려왕릉 등이다.

 

 

▲ 북한의 문화유산...개성 첨성대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려왕릉은 태조와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인 현릉(顯陵)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묻힌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충목왕 명릉(明陵)과 주변의 떼3피장자가 명확하지 않은 현릉(공민왕) 북서쪽의 왕릉 7기를 포함한 칠릉떼() 7릉 등 514릉을 포함하고 있다.

 

-강화도에도 4곳에 고려왕릉 있어 ... 39년 역사 고스란히 남아있어

 

강화도는 한강 이남의 유일한 고려 도읍지로, 고려 고종 19(1232) 몽골 침략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한 후 1270(고려 원종 11)까지 39년간이나 고려의 수도 역할을 해왔으며, 이를 강도(江都) 시대라고 부른다.

 

강도시대에 조성된 고려왕릉은 제21대 희종의 석릉(碩陵), 22대 강종 비 원덕태후의 곤릉(坤陵), 23대 고종의 홍릉(洪陵), 24대 원종 비의 가릉(嘉陵) 4기이다

 

 

▲ 강화도의 고려왕릉 © 한철수

 

 

여기에 능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제21대 희종 비의 성평왕후의 소릉, 1232년 강화로 천도할 때 함께 옮긴 세조(창릉)와 태조(현릉)의 무덤 등 총 7기가 있어야 한다. 1243년 세조와 태조의 무덤은 개골동으로 한차례 더 옮겼으니 능터는 9기가 되는 셈이다.

 

강화에는 고려왕릉으로 추정되는 능내리석실분, 인산리석실분, 연리석실분, 개골동 왕릉터 등은 잃어버린 5기의 왕릉 터로 봐야한다는 학설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강화에서 살해당한 창왕의 무덤도 이곳에 있지 않을까.

 

-강원도 삼척, 경기도 고양의 공양왕릉.... 알쏭달쏭한 고릉이야기

 

현재 고려 왕릉 중, 강화도 외에 남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고릉(高陵)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먼저 삼척 이야기다. 공양왕은 1389년 이성계 등에 의해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조선 개국 직전 폐위되어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강원도 삼척에서 시해를 당했다. 조선 현종 3(1662)에 삼척부사 허목이 지은 삼척부 읍지  <척주지(陟州誌)>와 철종 6(1855)에 김구혁이 편찬한 <척주선생안>에도 삼척에 공양왕릉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삼척의 공양왕릉 주변에는 4기의  무덤이 있다. 공양왕과 두 명의 왕자 그리고 시녀 또는 말무덤이다. 능은 3단 석축으로 구분하고 능 가운데 돌계단으로 오르게 조성했다. 능은 지름 13m 정도이며 봉분 앞에는 상돌이 있다.

 

 

▲ 삼척 공양왕릉 고릉     © 문화재청

 

 

이 능은 1995년 강원도 기념물 71호로 지정했으며, 능의 인근 마을인 궁촌에서는 어룡제를 3년마다 지내는데 이 능에 먼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

 

또한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는데 임금이 유배된 곳이라 하여 궁촌, 마을 뒷길 고돌산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여 살해재, 왕자 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 등이 그것이다.

 

이번엔 고양이야기다. 공양왕이 조선 태조 2(1394)에 삼척에서 살해당하고, 삼척에 있던 공양왕과 부인 순빈 노씨의 무덤을 태종16(1416)에 고양으로 옮겨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 고양 공민왕릉 고릉     © 문화재청

 

 

봉분 앞에는 묘갈(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봉분 양옆에는 키가 크고 작은 4기의 문인석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석인은 모두 공복에 복두를 착용하고 있다.

 

이곳이 공양왕의 무덤임을 알리는 고종 4(1867)에 세운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 새긴 표석이 있다. 이 무덤은 1970년 사적 제191호로 지정됐다.

 

<다음은 조선왕릉이야기(1)>

 

[참조문헌: 아름다운 우리문화재-3 고려왕릉(장경희. 예맥. 2008.12), 조선왕릉학술조사보고서 조선왕릉-1(고려말+조선초.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5), 조선왕릉-왕실의 영혼을 담다(국립고궁박물관. 2016.6), 조선왕릉 석물조각사(국립문화재연구소. 2016.12), 세계유산 조선 왕릉과 동아시아 황릉(국립문화재연구소. 2016.6) 개성박물관(인터넷 두두피아), 고려조선왕릉지(목을수. 문성당. 1991.9), 기내능원지(문영빈 목을수. 경기도. 1991.10) 외 다수

 [참조논문] 왕릉건축을 통해 본 박자청의 김사행 건축 계승(김버들 조정식. 건축역사연구 272. 2018. 4), 조선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에 관한 연구(김상협 박사논문. 명지대. 2007. 12),강화 고려왕릉의 피장자 검토(이상준. 중앙고고연구 제23. 2017) 외 다수

[사고] 본고는 본지 한철수 보도위원이 운영하고 있는 구지옛생활연구소에서 제공한 글과 영상입니다. 인용을 할 때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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