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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왕좌에서 쫓겨난 왕의 제향은 이렇게...광해군 377주기 기신제 거행
8월 7일 음력 서거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첫 시행...관계자 150여명 참여
기사입력: 2018/08/09 [02:24]  최종편집: ⓒ 경기인터넷뉴스
한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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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경기인터넷뉴스] 조선조 제15대 왕 광해군의 377주기, 문성군부인 유씨 395주기 기신제가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산59번지에 위치한 묘역에서 지난 7일 정오에 열렸다.

 

이 기신제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와 남양주문화원이 주최하고, 남양주시의 후원으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광해주숭모회가 주관했으며 <조선 제15대 광해주와 문성군부인 제향>의 제하에 진행됐다. 숭모회와 조선왕릉 봉향회, 문화류씨 대종회, 남양주문화원, 남양주시민, 세계문화유산답사클럽 회원 등 150여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부원군 문화 류씨 대종회     © 한철수기자

 

 

광해주숭모회 이재천 회장은 광해군(光海君)을 광해주(光海主)라 부르는 이유는 왕을 지낸 분을 군이라 부르는 것이 안타까워 임금을 뜻하는 광해주라 하고 매년 제를 올린다. 작년까지는 광해주가 승하하신 음력 7월 1일에 지냈으나 다른 왕릉의 전례에 따라 양력으로 변환하여 올해부터는 매년 87일에 지내기로 했다.”고 전했다.

 

남양주문화원 이보긍 원장은 남양주시는 조선왕조 역사 교육장이다. 조선왕릉인 사릉과 광릉 대한제국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 그리고 순강원, 휘경원, 영원, 회인원은 물론 광해군과 임해군의 묘는 물론 그들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성묘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 고종태황제의 생부 흥선대원군과 정조의 장인 김시묵(효의왕후 생부), 안빈묘, 영빈묘, 경빈묘, 복성군묘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오늘 광해군 제향을 맞아 남양주시의 역사를 되새기게 됐다.”고 했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삼헌관...초헌관 이보긍(남양주문화원 원장), 아헌관 류삼현(문화류씨대종회 회장), 종헌관 이내길(광해주숭모회 이사)     © 한철수기자

 

 

-광해주 377주기 기신제는 이렇게...두 분을 모시는 합설로 진행

 

이날 기신제는 섭향례 제의에 따라 묘위 도로위에서 전향례를 마치고 묘로 향하는 예묘소(詣墓所), 묘에 도착하면 헌관과 제집사가 두 번 절을 하고 제집사가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 봉무 할 자리로 가는 제집사 취위(就位), 전사관()과 묘사(잡탕, 전증)가 제상에 제수를 올리는 진선(進饍), 진선을 마치면 초헌관이 손을 씻고 준소(樽所)에서 술잔을 따르고 신위(神位. 상석앞 제상) 앞으로 간다.

 

초헌관은 향을 세 번 향로에 넣는 삼상향(三上香), 재랑과 알자의 도움으로 잔을 올리는 헌작(獻爵), 잔을 올리고 나면 대축이 제수의 뚜껑을 열고 수라()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의 자루가 서쪽을 향하도록 올려놓는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제수를 진설하는 전사관과 묘사     © 한철수기자

 

 

이어 대축이 축을 읽는데 헌관과 제집사는 물론 제에 참여한 재위자(在位者)는 무릎을 꿇고 축이 끝나면 일어선다.

 

아헌관과 종헌관이 잔을 올리는 아헌례·종헌례를 마치면, 헌관이 두 번 절을 먼저하고 재위자도 이어 두 번 절을 한다. 절을 마치면 대축은 제수의 뚜껑을 닫는다. 대축이 축을 들고 망료위로 나아가 초헌관에게 축을 태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잔을 들어 올리는 헌관     © 한철수기자

 

 

대축과 알자는 예감으로 가 축을 불사른다. 이를 망료례(望燎禮)라 한다. 망료를 마치면 1시간여 진행된 기신제를 마친다. 이를 예필이라 한다. 제례를 마치면 상을 물리는 철찬(撤饌)을 한다.

 

이를 간단히 소개하면 <전향례-예능소-제관취위-진선-행초헌례(삼상향-헌작-독축)-행아헌례-행종헌례-망료례-예필-철찬>이다.

 

광해주 기신제는 원래 정자각에서 지내야하나 묘소 아래 있었던 재실을 비롯해 정자각, 홍살문 등 제의공간이 사라져 묘소 앞에서 지냈으며, 광해주와 문성군부인 류씨와 함께 지낸 합설이므로 잔은 두 잔을 올리고, 절은 종묘에 신주를 두자 못한 왕자의 신분이기에 4번이 아닌 두 번 절을 한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준소에서 잔을 따르는 집준자     © 한철수기자

 

 

-광해주 377주기 기신제는 이렇게...누가 봉무(奉務)했나

 

이날 제향은 삼헌관 중 초헌관은 남양주문화원과 부원군 후손인 문화 류씨 대동회에서 이하 헌관과 제집사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위원이 맡았다.

 

자세히 살피면 초헌관 이보긍 남양주문화원장(태조의 동생 의안대군 후손), 아헌관 류삼현(문화류씨대동회 회장. 부원군), 종헌관 이내길(광숭모회이사. 익안대군 후손)이 담당을 했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제집사와 삼헌관     © 한철수기자

 

 

제집사는 찬자 이재흥(신성군 후손), 대축 이범춘(광평대군 후손), 축사 이도재(근영군 후손), 재랑 이기종(진남군 후손), 집준자 이형수(영응대군 후손), 전사관 이승용(인성군 후손), 묘사 이호찬(화의군 후손), 알자 이무용(인성군 후손) 등이 소임을 다했다.

 

제관의 제복(祭服)은 오사모(烏紗帽)에 옥색의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흑각대와 호패를 단 끈을 두르고 흰색 예화(禮靴)를 신는데 이를 백피화(白皮靴)라고도 한다. 오사모의 날개는 삼헌관과 제집사의 문양이 다르다. 삼헌관의 날개에는 구름무늬가 있는 망사를 제집사는 무늬가 없는 망사로 꾸몄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알자가 헌관을 이끌기위해 손을 올려 인사     © 한철수기자

 

 

-광해주 377주기 기신제는 이렇게...제수는 무엇을 올렸나

 

광해주 기신제향은 <원묘제향진설법(園墓祭享陳說法)>에 의해 진설을 했다. 아래서 위로 6열로 1열에 산자(백산자 2우리, 홍산자 1우리)과 왕실 약과인 중박계(3우리)을 배설했다.

 

2열에는 추자(楸子.호두) 또는 은행(銀杏) 1종자우리, 말린 잣인 백자(白子) 1종자우리, 간장인 개장(介醬) 1종지, 느타리버섯인 추이채(椎栮菜) 1접시, 파래김인 청태채(靑苔菜) 1접시, 도라지나물인 길경채(桔梗菜), 말린 대추인 건조(乾棗), 말린 밤인 황률(黃栗) 그리고 1열과 2열 사이 촛대를 양쪽 끝선에 둔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 제수진설     © 한철수기자

 

 

3열에는 백다식(白茶食)과 홍다식(紅茶食)을 각 2우리를 교대로 진설한다. 4열에는 탕과 떡으로 잡탕(雜湯전증(煎蒸백증(白蒸)을 각 1그릇씩 배치하며, 떡은 절병(切餠상화병(霜花餠자박병(自朴餠)을 각 1접시를 둔다.

 

5열에는 군의 수라(水剌. 진메. ), 국수인 면(), 군부인의 수라(水剌)1그릇씩, 시접(匙楪)그릇, 두부부침인 포적(泡炙)을 진선(進饍)한다. 마지막 6열에는 술을 부은 잔인 작()과 받침대인 점()을 두는데 삼헌관이 두 잔씩 올리므로 36벌이 된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제수진설도     © 한철수기자

 

 

제상 아래에는 축을 두는 축상(祝床)과 향로·향합·전촉기·전촉자를 올려 두는 향상(香床)을 둔다. 무덤 동남방향 망주석 주변에 술단지인 준뢰와 술잔인 작을 올려두는 아라상인 준상(樽床)이 있는 곳을 준소(樽所)라 한다. 제주는 청주(淸酒)를 사용한다. 청주는 아주 맑은 술로 맛도 진하다. 겨울에 빚어 여름에 사용한다하여 과하주라고도 한다.

 

조선왕조 제향에 사용되는 술잔과 받침대는 놋쇠(유기)로 만들었다. 받침대인 점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며, 술잔인 작의 발은 셋인데 천지인의 원리에 따라 양쪽 기둥 중 한쪽은 용머리를 새겼는데 이는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산뢰(山籟)라는 술단지에는 산과 구름 그리고 우레를 새겼으며 산뢰의 덮개는 검은 소건포로 만든 멱()이며, 술을 따르는 국자는 용작(龍勺)이라 한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관세 ... 신위전에 들기전 손을 씻는 헌관     © 한철수기자

 

 

-광해주 377주기 기신제는 이렇게...광해임금의 발자취

 

광해군은 선조8(1575) 426일 선조의 둘째 왕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이고 생모는 김희철의 딸 공빈(恭嬪) 김씨로 광해군이 3살 되던 해 25세로 죽어 성장과정에 있어서 정서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년기에는 하락, 이기설 등 당대 명망이 높은 스승에게 수학을 했으며, 총명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인다.

 

광해군은 13세에 한 살 어린 류자신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선조의 원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에게 자식이 없자, 형인 임해군(臨海君) 이진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인륜을 저버리고 난포하다고 하여 보류되었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예묘소... 제를 지내기위해 광해굼묘로 향하는 제관들     © 한철수기자

 

 

18세에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425일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어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 위임받아 임시로 나랏일을 돌보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 모집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 왕의 임시거처)에서 합류하였다. 여기서 분조란 선조를 대조(大朝), 세자인 광해를 소조(小朝)라 하며 나랏일을 나누어 통치한 것을 말한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광해군묘     © 경기인터넷뉴스DB

 

 

전후 조정(朝廷)은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이 와중에 선조가 재위 41년 만인 160821일 정릉 행궁(行宮)에서 승하하자 이튿날 34세의 나이로 조선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광해군표지석 탁본과 비음기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광해주숭모회

 

 

즉위에 앞서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광해군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한 후,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붕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광해군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을 했으며 밖으로는 명·청 교체시기를 맞아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으며 전후복구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하였다. 또한 왜란으로 불에 탄 창덕궁, 경덕궁(慶德宮. 경희궁), 인경궁(仁慶宮) 등을 다시 지었다. 소실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도 다시 간행했으며, <국조보감, 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삼헌관과 알자     ©한철수기자

 

 

 

이무렵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편찬되었다. 외래 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유규국(류큐)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그들의 정략에 밀려 종실을 지키지 못하고 어린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민심은 이반이 되고 정치적 혼란 속에 계해년 인조반정으로 자신도 49세에 폐위가 되어 광해군 왕자가 되어 가족 모두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다.

 

며느리가 자결을 하고 아들, 부인이 연달아 죽음에 이르고 광해는 15년 동안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37년 제주도로 옮겨진다. 제주로 간지 4년 만이고 왕좌에서 물러난 지 18년 만인 인조19(1641) 7167세의 일기를 마친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봉인사 큰번당의 광해군 신주     © 한철수기자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광해주 377주기 기신제는 이렇게...가까운 곳에 생모와 형의 무덤이 있어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죽자 인조는 예조참의 채유후를 호상(護喪)으로 보내 장사를 치르게 했다. 당시 법으로 죄인은 상여를 맬 수 없으나 채유후는 담군(擔軍)에게 백건(白巾)을 쓰게 하고 여염집 상여행렬로 장례를 치러 탄핵을 당했다.

 

이렇게 제주도에 장사지냈다가 164310월에 지금의 묘소로 왔다. 부인 유씨도 강화도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가 함께 이곳으로 왔다. 묘는 쌍분(雙墳)이며 곡장(曲牆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문인석(文人石망주석(望柱石) 등이 있다.

 

 

▲ 제377주기 광해군 기신제...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의 성묘     © 한철수기자

 

 

광해군 묘역 주변에는 그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와 형인 임해군 묘역이 그리고 지척인 동구릉에 아버지인 선조의 무덤이 있고, 수락산 자락에는 할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무덤이 있어 가히 3대가 사후에 만나 조우하는 모습이다. 

 

봉인사는 광해군과 공빈의 원찰로 매년 광해군의 음력기일을 맞아 <광해주 추선재와 학술대회>를 오는 11일 봉인사 지장전에서 오전 10시부터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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