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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계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앞둔...조선왕릉이야기(4)
(4) 고려시대 왕릉이야기-1
기사입력: 2018/07/24 [10:09]  최종편집: ⓒ 경기인터넷뉴스
한철수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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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릉과 정릉     © 문화재청

 

4) 고려시대 왕릉이야기-1

 

고려왕릉은 제1대 태조의 현릉(顯陵)부터 제34대 공양왕의 고릉(高陵)까지 왕과 왕비의 능은 총 60기로 알려졌으나 능의 소재가 확실한 것은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을 비롯한 19기를 제외하고 능주와 소재지가 불분명한 것이 많다.<표 참조>

 

고려왕릉은 개성을 중심으로 개풍, 장단 그리고 강화도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개성의 송악산 북쪽과 만수산 남쪽일대에 20여기의 능을 조성했다. 무신정권과 몽고의 간섭을 받을 시기인 19대 명종부터 강화도로 천도하였기에 4기의 능이 존재한다. 대몽항쟁을 마치자 다시 개성지역으로 돌아간다.<고려왕릉 분포도 참조>

 

 

▲ 대동여지도로 보는 고려왕릉 분포도(녹색 고려왕릉, 붉은색 조선왕릉)     © 한철수

 

 

한반도 문화유산의 절반이 존재하는 북한도 주요 유적, 유물을 특별히 보존·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북한에는 우리의 <문화재보호법>에 해당하는 <민족유산보호법>이 있다. 민족유산보호법에 따라 민족유산(남한의 문화재개념)을 물질유산(유형문화재 등), 비물질유산(무형문화재), 자연유산(천연기념물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국보, 보물, 사적,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처럼 특정 문화유산을 국가가 지정하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남한의 국보는 국보유물(유적), 보물은 준국보유물(유적)으로 이외 일반유물과 비물질유산(무형문화재)도 지정하고 있다. 비물질유산은 국가비물질유산, 지방비물질유산 등 이며, 자연유산은 명승지, 천연기념물 등으로 구분한다.

 

 

▲ 고려의 수도 개성 주변과 강화 등에 분포된 고려 왕릉(회색 칸은 능주를 알수 있는 능)     © 한철수

 

 

고려왕릉은 국보유적, 보존급유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나 2008년 장경희 교수가 펴낸 <아름다운 우리문화재(3) 고려왕릉>을 살펴보면 많이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왕릉은 풍수도참설에 의해 조성

 

고려 왕릉은 풍수 사상에 따라 용맥(龍脈)이라 부르는 산줄기 언덕에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네 방위에 따라 북에 주산(主山. 현무玄武), 남에 안산(案山. 주작朱雀), (왼쪽)에 청룡(靑龍), (오른쪽)에 백호(白虎)의 지형에 능의 오른쪽 물길이 능 앞으로 흐르는 생기(生氣)가 명당을 가두는 곳을 최고로 삼았다.

 

우리나라 왕릉에 풍수도참사상이 언제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통일신라 이후 중국에 다녀온 선종의 승려들에 의해 유포된 것으로 보이며, 도성국사가 집대성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태조 왕건의 현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은 신라 제35대 경덕왕릉을 비롯한 통일신라 능제의 영향을 받았다.

 

 

▲ 고려 공민왕릉의 측면도와 내외부 모습...고려왕릉은 봉분에서 정자각까지 3~4단으로 배설    ©장경희 교수의 <고려왕릉>에서 발췌

 

 

고려 왕릉은 산의 기운을 받기위해 3단 혹은 4단의 석축을 쌓아 조성하였다. 1단의 봉분은 장대석 위에 흙으로 무덤을 만들고, 12면 병풍석(屛風石)과 난간(欄干)을 둘렀으며, 4방에 호랑이(혹은 사자)와 양의 모습을 한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봉분 뒤()쪽에는 곡장(曲墻. )을 세워 바람을 막고 봉분 앞에는 석상(石床)인 혼유석(魂遊石)과 혼유석 양쪽에 망주석(望柱石) 한 쌍을 세웠다.

 

2단에는 석등인 장명등(長明燈)과 문석인(文石人), 3단에는 무석인(武石人)을 세웠는데 왕과 왕비 혼자면 1쌍씩, 왕과 왕비가 함께 있으면 2쌍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4단에는 정자각과 부속건물을 두었다.

 

 

▲ 고려의 왕릉...제5대 경종의 영릉, 6대 문종의 강릉, 11대 문종의 경릉, 제12대 순종의 성릉     ©장경희 교수의 <고려왕릉> 발췌

 

 

-고려 왕릉은 대부분 현실... 내부에 벽화도 그려

 

고려시대 왕릉의 내부는 관을 넣을 현실(玄室. 주검칸. 무덤방)을 설치했고, 구덩이를 깊게 팠기 때문에 평지에 조성한 신라 왕릉보다 봉분의 높이는 낮아진다. 고려 초기 왕릉은 통일신라에 사용했던 횡혈식석실분을 사용하고 있다. 무덤방과 외부를 연결하는 연도(널길)는 점차 사라진다.

 

현실은 관을 올려놓은 무덤방(널방. 묘광)으로 깊이는 10척 내외, 폭은 9척 내외, 높이는 7~8척 정도이다. 돌바닥위에 직사각형의 석곽(관받침대)을 둔다. 이 받침대 옆 공간은 부장품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면의 벽과 천정에는 회반죽을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천정에는 일월성신과 은하수 등 별자리를 4면의 벽에는 사신도를 그리거나 공민왕의 현릉처럼 12지신을 새긴 중국풍의 양관인 관모를 쓰고 홀을 든 문인상을 그리기도 한다.

 

 

▲ 공민왕릉의 현실벽화...개성박물관     © 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01012000656045

 

 

현릉은 북쪽에 <-돼지-->, 동쪽에 <호랑이-토끼-->, 서쪽에 <--원숭이-> 순으로 배치했다. 남쪽은 문비석이라는 문을 굳게 닫고 흙을 덮었을 것으로 보인다. 12지신상을 크기는 70~75cm정도이며, 여의두문의 구름위에 서있다.

 

문인상의 복장은 모자는 붉은 끈을 턱 아래까지 내리고, 화려한 채색의 관복을 입고 있다. 천정에는 북쪽에는 북두칠성, 남쪽에는 남두육성을 6cm 정도의 붉은색으로 칠했다.

 

고려왕릉의 침향(枕向. 또는 좌향坐向)은 남향이다. 침향은 죽은 이의 머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민족, 종교의 특색을 드러낸다. 선사대에는 머리를 동쪽에 발을 서쪽에 두는 동침과 남침으로 구분했다. 이는 해가 뜨고 뜨겁게 달궈지는 방향에서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5~6세기 고구려부터 점차 북침(北枕) 남향(南向)으로 바뀐다.

 

<다음은 고려시대 왕릉이야기(2)>

 

[참조문헌: 아름다운 우리문화재-3 고려왕릉(장경희. 예맥. 2008.12), 조선왕릉학술조사보고서 조선왕릉-1(고려말+조선초.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5), 조선왕릉-왕실의 영혼을 담다(국립고궁박물관. 2016.6), 조선왕릉 석물조각사(국립문화재연구소. 2016.12), 개성박물관(인터넷 두두피아), 고려조선왕릉지(목을수. 문성당. 1991.9), 기내능원지(문영빈 목을수. 경기도. 1991.10) 등 다수

 [참조논문] 왕릉건축을 통해 본 박자청의 김사행 건축 계승(김버들 조정식. 건축역사연구 27권 2호. 2018. 4), 조선왕릉 석실및 능상구조에 관한 연구(김상협 박사논문. 명지대. 2007. 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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