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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수가 만난 사람(1)...달에서 아버지를 찾은
김석심 시인
시는 신앙을 넘어선 소망 믿음으로 승화...70대에 두 권의 시집을 발표
기사입력: 2014/01/28 [11:53]  최종편집: ⓒ 경기인터넷뉴스
한철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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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나이를 넘어선 무한 창작 욕구...과감히 책으로 펴내
-시는 신앙을 넘어선 소망 믿음으로 승화...아직은 청춘

▲  김석심 시인    © 경기인터넷뉴스
올 들어 처음으로 겨울비가 내린다. 거리는 온통 물안개로 가득하다. 설을 앞둔 주말이라 구리전통시장에는 장바구니를 든 이들로 분주하다. 추적거리는 시장통을 지나 구리시 인창동의 한 빌라를 찾는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詩)창작에 있어서는 사랑과 반항의 상징 20대 청춘이나, 이성의 심장으로 시류(時流)를 시어(詩語)로 자아내는 4~50대 중년의 열정을 지닌 김석심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김석심 시인과 인연은 8년 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리문인협회에서 주관한 구리문예대학이다. 당시 글쓴이는 구리문인협회 회원이었기에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20여명의 수강생 중에 단아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24강좌를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을 했다. 문학 초년생이 창작에 대한 긴장과 이완의 있었음에도 동기생들을 위래 늘 주저부리를 준비해 긴장을 풀어주던 맏언니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뒤 그는 구리문인협회는 물론 한국문인협회에 등록하고 본격적인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많은 것이 궁금했다. 저 나이에 손자, 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자연스러울 텐데... 그래서 본지(本誌) “한철수가 만난 사람”의 첫 대상으로 그를 삼았다. <글쓴이 주>
 
-오래 살라고, 목숨을 귀하게 여기라고 이름에 돌[石]을 넣은 부모님
 
김석심은 72년 전인 1942년 전남 신안군 암태도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와 베를 짜던 어머니 사이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많은 형제를 출산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8남매가 줄줄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잉태는 곧 불안이었다. 남은 1남 2녀를 애지중지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또한 오래 살라고 ‘돌 석(石)’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었다.
 
돌은 던져도 깨지지 않고,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녹지도 않기 때문에 석매, 석수리, 석심이라 지었다. 그래서 언니와 오라버니의 이름에 돌과 하늘을 나는 매와 수리를 넣었고, 돌의 깊은 마음을 새기라고 그의 이름을 돌 석, 마음 심이라 했다. 그의 표현으로 징한 이름의 사연이다.
 
“암태도에서 가장 가까운 큰 도시는 목포입니다. 지금이야 뱃길로 한 시간 이내로 왕래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네 시간이나 걸리던 먼 섬이었습니다. 거리는 그대로인데 오가는 배의 속도가 빨라졌지요. 통통배에서 쾌속정으로... 섬을 떠난 지 오래 됐지만 지금도 섬의 구석구석이 눈에 선합니다.” 
 
▲20대의 김석심 시인(왼쪽에서 두 번째 짙은 한복. 네 번째 김신자 친구)     © 경기인터넷뉴스
   
-학교가 너무 가고 싶어 마신 막걸리...속성으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문학의 꿈이 생겨
 
생명이 귀한 만큼 애정은 애착이라 했던가. 부모님은 막내 딸만큼은 앞세운 형제보다 길게 살기를 바랐고, 밖으로 내둘리면 혹 생명이 지장이 있을까 주머니 속 공주처럼 학교도 보내지 않고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가방을 매고 책보를 두르고 등하교하는 또래를 바라보는 석심은 늘 속이 상했다.
 
“조잘거리며 학교를 오가는 친구들과 언니들을 보면 얼마는 부러웠던지. 열 한 살 되던 해 봄이었어요. 학교에 보내달라고 떼를 쓸 기회가 없었지요. 집에서 학교까지는 시오리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공부보다 생명을 중시여긴 터라... 마침 마을에서 공동으로 30여명이 모내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대형사고를 쳤지요.”
 
생명의 끈과 공부에 대한 열망은 가족끼리 늘 엇갈렸고, 어린 석심은 이날 중참으로 내간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곤 실신을 했다. 동네에선 난리가 났다. 금이야 옥이야 하던 막내딸, 아니 아홉 번째 희생이 눈앞에 있었으니 웅성댐은 마을 전체의 걱정거리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읍내에서 왕진을 온 의사는 ‘술에 취해 그런 것이니 걱정을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돼 자초지종 물었다.
 
“저는 ‘공부도 못하는 인생이 살면 뭐해요. 아무리 여자라 해도 초등학교는 나와야지요. 죽으려면 이래도 죽고, 살려면 저래도 사는데 어찌 나를 가두어두고 살게 해요. 나는 살고 싶음 마음도 없고, 그래서 죽으려고 그랬어요.’라고 했지요”
 
어린 석심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속내를 퍼부었다. 승리였다. 아닌 공부에 대한 갈망이 부모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음 날 석심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꿈에 그리던 학교를 찾는다. 암태중앙초등학교의 분교인 암태동초등학교다.
 
“학교에 가자 교장선생님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교과서를 내놓고 테스트를 했어요. 저는 이미 마을의 야학을 통해 국문과 기초산수를 터득하고 있었지요. 교장선생님은 제 나이에 맞는 4학년에 편입학을 시켰습니다.”

초등학생 석심에게 시오리길 등굣길은 늘 가깝기만 했다. 학교 수업도 잘 따라갔지만, 글짓기 실력은 남달랐다. 3년간 학교생활을 하면서 매번 큰상을 받는다. 이때부터 문학은 가슴과 심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이 시절 행운은 한번으로 끝났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중학교 진학을 준비를 했으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 석심은 진학을 포기한다.

▲  40대의 김석심 시인(왼쪽)    © 경기인터넷뉴스

 -정체된 삶, 8년간 목포생활...스물 살에 짝을 만나 서울로, 그저 평범한 주부 25년
 
바다가 좋고 산이 좋고 사람이 좋았던 암태도를 슬라이드 필름으로 남기고 섬을 떠나 목포항에 도착한다. 일찌감치 출가한 여섯 살 손위 언니 집에서 조카들을 돌보며, 도시생활에 적응을 한다. 석심은 8년간 모든 생활이 정체된다. 학습에 대한 의욕도, 문학에 대한 꿈도 바다 너울에 씻겨가는 물거품처럼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스무 살에 당시 체신부 직원이던 남편을 만나 혼인을 했습니다. 그저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지요. 당시는 그것이 운명이라 여겼지요. 그런 생활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어요.”
 
남편에게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누이가 있었다. 석심 부부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서울행이다. 당시는 그랬다. 소위 산업화시대의 필부필부(匹夫匹婦)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다반사였다.
 
“팔도의 사람도 소도 다 모인다는 마장동 뚝방촌으로 이사를 했지요. 남편의 사업도 녹녹치 않았습니다. 공무원생활을 하던 사람이... 아무튼 남편은 서너 차례 사업을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은 안정이 됐지요. 당시 단칸 방에서 두 칸으로 두 칸에서 독채로 세를 얻어가는 희망이었지요.”
 
석심 가족은 생선, 야채, 과일 장사를 하면서 겨우 두 칸 방을 얻었을 때 이미 5남매를 뒀다. 그리고 불편한 시누이, 시아버지... 마장동의 생활은 20년을 넘게 이어진다.

▲제2의 인생을 이끈 청암학교 고교과정 졸업사진(오른쪽에서 네번째 붉은 점퍼가 김석심시인)      © 경기인터넷뉴스

-40대에 은인 친구를 만나...삶의 봄날을 맞이한 신촌 웨딩숍
 
석심은 어느새 중년에 이른다. 질곡의 세월을 뒤돌아 볼 새도 없이. 석심은 마음을 둘 곳이 필요했다. 당시 아현동에서 웨딩숍을 운영하던 고향친구가 있었다.
 
“김신자입니다. 제 일생에 있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틈만 나면 아현동 웨딩숍에 찾아갔지요. 이런저런 수다고 떨고. 하소연도 늘어놓고 그렇게 십 수 년을 만났습니다. 자주만나면 정이 들잖아요. 그 친구가 웨딩숍을 운영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지요. 그래서 친구는 윗가게, 저는 아랫가게 그렇게 나란히 운영을 했습니다. 제가 45세 되던 해입니다.”
 
마장동에서 아현동를 오가며, 친구의 웨딩드레스 꾸미는 모습을 늘 바라보았고, 어깨너머로 배워 자신만의 웨딩드레스 숍을 연다. 어엿한 사장이 된 것이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90년대 어려운 시절이 지나고 웨딩업계는 호황을 맞는다. 단순한 결혼식에서 웨딩패키지라는 종합사업으로 성장을 한다. 석심도 이 시류(時流)에 큰 덕을 본다. 석심은 나름 성공을 했다. 석심 일생의 봄날었다. 아내는 신부의 옷을 짓고, 남편은 선남선녀에 덕담을 주는 주례사를 행복한 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늘 가슴 한 구석에는 뭔가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 김석심 시인의 "가슴에 그린 수채화(제1집)"와 "아버지의 달(제2집)" 그리고 동인지     © 경기인터넷뉴스

-‘나도 저길 가야하는데...’ 60대에 만학의 꿈을 이뤄...70대 아직은 대학생
 
석심의 가게 앞에는 양원학교가 있었다. 바쁜 바느질과 상담 중에도 날마다 유리창 너머로 이 학교를 바라본다. 그리곤 재잘거리며 예쁜 교복을 입고 등하교하는 솜털같이 아름다운 여학생이 된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끔은 넋을 놓기도 했다.
 
“저길 가야지. 돈도 명예도 저 곳만은 못한데. 나도 저길 가야하는데... 갑자기 못 다한 공부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을 알게 됐지만 마음만 있었지요. 정문 앞에 가서는 기웃거리고, 돌아서기를 수 없이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 교무실을 찾아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지요. 그때 여직원이 한 말이 뒷머리를 잡았고, 온 몸이 ‘짜릿’ 하더라구요.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나요. 저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나 봐요. 충북 제천에서 한복집을 운영하는 여성인데, 일 년에 몇 번씩 학교는 잘 있냐고 묻고는 했대요. 그분 역시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나 봐요.”
 
그녀는 석심의 타산지석이 됐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더 늦출 수는 없었다. 석심은 사업장을 남에게 넘겨주고는 입학원서를 제출한다. 사업에 대한 애정보다 배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양원학교는 졸업장을 주는 곳이 아니라 검정고시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검정을 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정식 졸업장을 받고 싶었습니다. 아니, 정식학교를 다니고 싶었습니다. 수소문을 해보니 중계동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학교가 있더군요. 바로 ‘청암중고등학교’입니다. 바로 입학을 했지요. 등록에서 입학으로...”
 
인생은 60부터라고 했던가. 석심은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50년 만인 63세에 정식으로 배움의 길을 선택한다. 마음 한 구석에 늘 남아있던 단발머리 여학생은 아니었지만, 첫 등교일은 그 모습이 이었으리라. 그래도 양원학교에서 1년을 넘게 중학교 과정을 밟았기에 손쉽게 넘어갔다. 이어 고등학교 과정도 마친다. 그리고 지금은 어엿한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재학생이다.
 
▲  두번째 시집 "아버지의 달" 출판기념회    © 경기인터넷뉴스

 -65세에 문학을 꿈을 일궈...구리문예대학에서 문학 수업 
    
석심은 배움의 끈을 잡으니 이번엔 삶속에서 묻혔던, 아니 숨겨졌던 문학의 씨앗이 꿈틀거렸다.
 
“중학교 과정은 앞문으로 들어갔다 뒷문으로 나왔지요. 중학교 과정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도 배웠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 ‘달뜨는 교실’이란 문예창작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작품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작가로 선정이 됐습니다. 글을 써보라고 추천한 이창래 선생님, 손수 시집을 사주며 글쓰기까지 지도해 주신 백인희 선생님, 컴퓨터를 지도해 주신 윤승철 선생님과 정명래 선배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분들을 지금도 늘 고마워합니다.”
    
석심의 일생에 있어서, 사업의 동반자이자 친구인 김신자를, 글을 지도한 이창래, 백인희 선생을, 컴퓨터를 지도한 윤승철 선생과 정명래 선배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니 평생 은인(恩人)으로 여긴다. 백 선생은 석심과 쪽지를 주고받으며, 창작물을 돌봤으며, 칭찬과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 한 마디가 평범함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백인희 선생은 감성적인 비판보다는 이성적인 칭찬으로 석심이 한땀 한땀의 바느질로 웨딩드레스를 제작하듯 시어(詩語)를 찾게 했고, 지금은 시인의 반열(班列)에 올려놓았다.
 
▲  창작의 열정이 남다른 김석심 시인    © 경기인터넷뉴스

-구리문인협회 가입과 활동은...제3의 인생을 살아가
 
석심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구리시 인창동으로 이사 온다. 이 시기는 청암학교 생활과 시 창작활동의 시작점이다. 2007년 봄, 등굣길에 눈에 들어 온 것이 “구리문예대학 수강생 모집” 현수막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욕구를, 창작의 부족함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등록한다. 떠듬거리며 원고지를 겨우겨우 메우던, 습작 수준의 작품을 이때부터 다듬기 시작한다.
 
구리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의 범위를 넓힌다. 그리곤 수필은 2008년 모덴포엠에서, 시는 이듬해 한국작가로 등단한다. 드디어 우리나라 문단에 ‘김석심’이란 ‘이름 석자’를 올려놓는다. 또한, 석심은 제44회 신사임당의 날 예능대회에서 ‘고향’으로 장원에 오르고, 이를 계기로 충남 보령에 시비(詩碑)가 서는 영예도 안았다.
 
“인생에 세 번째 큰 인연을 만났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창작 활동을 하다가 구리문예대학에서 3년간 문학 수업을 받으며, 많은 변화가 왔습니다. 신세계가 보였습니다. 선배 문인들의 많은 작품을 탐독하면서, 용기를 냈습니다. 그래서 고향과 이웃, 자연을 대상으로 한 시집 ‘가슴에 그린 수채화’를 발표했습니다.”
 
시인이 첫 번째 낸 작품을 처녀작, 첫 번째 시집을 처녀시집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석심을 그때 알았다. 첫 시집을 손에 들었을 때, 시집 간 첫날처럼 설렘과 두근거림에 청심환을 먹고서야 진정시켰다. 이 시집은 시인 김석심에게 특별함 그 자체였다. 문예춘추의 소크라테스문학상, 제13회 경기도문학상 시부문 신인상에 오르게 했다. 

▲보령의 문학공원 시비 앞에서     © 경기인터넷뉴스
    
“실로 벅찬 영광이었죠. 신안 무지랭이가 서울로 올라와 밥을 먹고 사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문학상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신은 두 가지 행복을 한꺼번에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삶의 도반이자 후원자였던 남편이 이 영광을 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먼저 가더라고요. 지금도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석심은 오롯하게 창작에 몰두한다. 두 번째 시집 “아버지의 달”을 2013년 10월에 세상에 내놓는다. 이 시집에는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 재생산됐다. 이 시집에서 석심은 아버지를 달로, 청암학교를 등불로 승화시켰다.  
 
▲      © 경기인터넷뉴스

겨울비가 내리는 날, 두 시간 남짓 그의 삶과 문학의 세계를 들었다. 김석심 시인은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넷이다. 그의 진솔한 배움에는 나이와 순서가 없음을 깨닫게 하고 있다. 그는 이제 늦깎이가 아니다. 노익장이란 표현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인터뷰 내내 꼿꼿하고. 자근자근한 말투가 그의 인생을, 문학을 대신하고 있었다.
 
시쳇말로 들었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김석심 시인을 통해 믿음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의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순간마다 환등기의 사진처럼 정체된 듯하면서, 시어들이 진솔이 무엇인지 귀의 애음(愛吟)으로 남는다.
 
그는 시는 신앙을 넘어선 소망이고, 사랑이고, 믿음이라 했다. 또한, 모든 만물이 주변의 사람으로 승화되고, 그 승화된 이야기를 시어로 자아낸다.   
    
인터뷰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자 비가 그쳤다. 구름 가득한 하늘 한 구석에 해가 고개를 내민다. 드높고, 너른 저 하늘의 저 햇살이 시인 김석심의 내일을 밝히고 있다.    
    
<글/한철수 기자, 사진/오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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