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특집(5)] 망우리공원, 기미만세운동 민족대표 3인의 명(明)과 암(暗)-3

둘, 조국을 향한 영원한 침묵 만해 한용운...승려 시인 소설가 계몽가

한철수기자 | 기사입력 2019/03/20 [16:58]

[3.1절 100주년 특집(5)] 망우리공원, 기미만세운동 민족대표 3인의 명(明)과 암(暗)-3

둘, 조국을 향한 영원한 침묵 만해 한용운...승려 시인 소설가 계몽가

한철수기자 | 입력 : 2019/03/20 [16:58]

 

[3.1100주년 특집(5)] 망우리공원, 기미만세운동 민족대표 3인의 명()과 암()-3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묘역에서 만나는 그들의 삶과 독립의 의미

 

 

▲ 망우리공원의 기미만세운동 3인...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 국가보훈처 국가기록관

 

 

 

, 조국을 향한 영원한 침묵 만해 한용운...승려 시인 소설가 계몽가  

 

 

내 물건을 내가 찾으려 하고 우리나라 주권을 우리가 찾으려 하는데, 그것을 가져간 사람이 나쁘지 찾으려는 사람이 왜 나쁜가 -만해 한용운의 어록    

 

만해 한용운을 모르는 이가 우리나라에 있을까. <님의 침묵>을 읊조리면서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을 추가한 이로, 절개가 굳은 이로 기억하고 있다.    

 

 

▲ 만해 한용운     © 국기기록원

 

  

33인의 동의를 얻고 서명을 했지만 만해는 최남선이 글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고 생동감이 없다고 생각해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가했다.   

 

-금일 오인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만해의 공약3장의 질서를 존중하라는 비폭력저항주의로 흔히 간디의 사상과 비견되기도 한다. 그래서 3·1만세운동은 전 세계에 전례가 없는 평화시위로 남아있는 것이다.

  

-백담사에서 정식 출가(出家)...불교의 개혁을 주장하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절의 일을 돕다 출가했다. -만해의 <나는 왜 중이 되었나>에서

  

만해는 고종16(187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옥(貞玉), 용운(龍雲)은 법명, 만해(卍海)는 법호이다. 고향에서 한문을 서숙(書塾)하다 고종 29(1892) 13세에 전정숙과 혼인하여 26세에 보국(保國)을 낳았다. 고종 31(1894) 동학혁명에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자 건양1(1896)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한때 만주 간도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광무5(1905) 인제의 백담사에서 정식 승려가 되었다. 이곳에 머물며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섰다. 이 책은 불교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꾀하기 위한 시론(時論)을 모은 것으로 1910년 탈고하고 3년 뒤 발간했다.   

 

만해는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박탈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부산 범어사에서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6년에는 서울의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불교의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는데 힘썼고, 계속 계동에 머물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했다.

 

 

▲ 기미독립선언서     © 국사편찬위원회

 

  

-오세창·최린의 제안 받아 ... 백용성과 3.1만세운동에 참가하다

  

만해는 망우리공원 가까이 묻힌 위창을 만난 때는 1919224일이다. 만세독립운동을 기획한 손병희·권동진·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들었다. 또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만해는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어 해인사의 승려인 백용성(白龍城)에게 알렸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인장을 위임받았다. 그는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라 하려고 했으나 <독립선언서>로 표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공약삼장>을 추가한 것이다.  

 

27일 최린을 방문하여 스스로 민족대표자로 서명 날인하고, 백용성으로부터 위임받아 서명 날인했다. 이튿날인 28일에는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준비 사항에 대한 최종 협의를 했다.  

 

3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인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하고 최남선이 선언서를 낭독하고 망우리공원에 삼각점으로 있는 오세창 박희도와 만세삼창을 외쳤다.  

 

이미 자수한 상황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연히 체포됐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또한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를 지어 독립을 주장했다.

 

 

▲ 일제시대 서대문형무소 전경...만해를 비롯한 민족대표 17명은 이곳 독방에서 형기를 마쳤다. 당시 수용인원은 500명이었지만 3.1절을 기해 3,000명정도가 투옥되었다.     © 국사편천위원회 역사우리넷

 

  

-만해의세계여행을 꿈 ... 연해주와 만주에서 봉변을 당하다

  

만해는 1896(18) 1차 출가에 이어 1904(25) 2차 출가한 후 백담사와 건봉사서 수행과 수학을 했다. 백담사에서는 승려의 기본을 익히고 백담사의 본사인 건봉사 강원(講院)에서 수학을 했다. 건봉사에는 지금의 초등과 중등과정의 봉명학교와 서울과 일본에 유학생을 많이 파견하는 근대적인 교육을 주력하는 사찰이었다.

 

만해는 건봉사에서 조선과 일본에 전래되어 양국의 개화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세계지리서 <영환지략>국가는 한사람 한집안의 소유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음빙실문집>을 읽고 새로운 세계관에 빠진다

 

그리고 근대문명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리곤 세계 일주를 단행한다. 만해는 금강경과 목탁을 담은 걸망을 메고 <블라디보스토크, 모스코바, 영국, 미국>을 거쳐 귀국할 계획을 세우고 출발을 했다.

 

 

▲ 만해에게 영향을 준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     © 삼성출판박물관&한국기독교박물관

 

  

그의 계획은 첫 경유지부터 어긋났다. 그곳의 교포들은 승복을 입은 그를 일진회로 여겨 그를 구타하고 감금하고 차가운 바닷물에 넣으려 했다. 동포로부터 지독한 봉변을 당하고는 구사일생으로 서울로 돌아온다.  

 

미련이 남은 만해는 19084월 신문명이 결집한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 조동종의 대표인 시로마 유끼오(弘津設三)를 만나 교유하고 그의 소개로 고마자와(駒澤) 대학의 전신인 조동종(曹洞宗) 대학에서 5개월간 수학을 했으나 자금부족으로 돌아온다. 이때 최린·고원훈·채두기 등과 친교를 했다.최린은 훗날 3·1운동의 동지가 된다.

 

 만해는 일본에서 돌라올 때 측량 기구를 하나 들고 와 <경성명징측량강습소>를 열어 측량기술을 1년간 수업했. 일제의 농지측량을 감시도 하고 사찰과 개인의 토지를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해는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승려도 혼인을 해야 한다는 자유론과 일본과 싸워 이기려면 인구가 1억명은 돼야한다는 출산계몽도 펼치고 19015월과 9월 통감부에 승려혼인에 대한 건백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유학시기와 이 건백서 제출은 만해가 아직 불교개혁은 왕성했으나 나라를 빼앗긴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라 많은 오해를 낳는다. 즉 불교개혁은 왕성했으나 민족의식은 아직 부족하다는 시각이 많다는 점이다

 

만해가 만주로 떠난 시점은 우리의 불교계의 연합단체인 원종(圓宗)을 승인하려고 애를 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에 원종의 대표인 해인사 이회광이 191010월 일본으로 건너가 만해를 도왔던 조동종과 <한일불교동맹조약> 7조항의 밀약을 하고 돌아온 것이 알려졌다. 한용운·박한영·진진웅 등은 이를 반대하고 임제종(臨濟宗) 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이 운동은 1년 만에 주저 않는다. 일제의 <조선사찰령>에 의해 퇴출을 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삿갓을 쓰고 바랑을 짊어지고 지팡이 하나 벗 삼아서 표연히 만주 길을 떠났었다...고국에서 먹고 살 수가 없어 가는 사람도 있었고, 또 그 무슨 뜻을 품고 간 사람도 많았다...우리 동포를 만나보고 서러운 사정도 서로 이야기하고 막막한 앞길도 의논하려 보리라 하였다 -별건곤 8(1927. 8)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 중  

 

만해는 나라를 빼앗긴 아픔과 자신이 행했던 임제종운동의 허한 마음을 달래고, 후에 자신이 추진하고자 하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홀연히 만주로 떠났다.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찌감치 만주 등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동포들의 상황도 살피고 만주의 독립운동 동향도 살피고자 했었다.  

 

만해는 연해주와 가까운 서간도 유하현 일대를 돌아보았다. 이회영·김동삼·박은식·이시영 등 지도자를 만나고, 신흥무관학교와 만주 각처에 흩어져 훈련을 받는 애국자들을 교우했다.  

 

만해의 허술한 승려 옷이 또 문제가 됐다. 만주 곳곳을 방문하던 중 만주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본 밀정으로 오해를 받아 독립군 청년이 발사한 총에 맞았다. 정신을 잃은 그에게 관세음보살이 현몽해 길을 안내해 마을까지 기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났다. 이 사건으로 만해는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요즈음 말로 틱장애를 갖고 있었다

 

-불교 청년 비밀결사대 만당(卍黨)...당수가 되어 후배들을 이끌다 

 

1928년경에는 조선불교청년회를 중심으로 불교계의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했는데 만해는 당수가 된다. 워낙 비밀리에 경성됐기 때문에 주요한은 자신이 자문위원인 줄 몰랐다고 한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김법륜과 일본 유학생 15명 등 24명으로 알려졌으나 80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을 했다.

 

1938년 주변 인물의 제보로 만당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김법린·장도환·최범술·박근섭 등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 까닭에 모두 방면됐다. 이들은 당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조학유라고 함으로써 한용운은 검거를 면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 만해가 말년을 보낸 심우장     © 한철수(2017)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하고...망우리로 오다

  

만해는 독립만세운동 이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교개혁과 조국 해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불량선인 즉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힌 후에도 1926년 저항문학으로 손꼽히는 <님의 침묵> 시집을 발표했다. 문학인으로서의 만해는 나중에 소개하고자 한다.

 

언론에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칼럼을 발표하고, 민립대학 설립과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김성수·조만식·안재홍·이광수·방응모·만공 등을 교우(交友)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193355세에 지인의 소개로 간호부인 유숙원과 재혼을 했고 이듬해 딸 영숙을 낳았다. 재혼 후 만해는 심우장(尋牛莊)에 머물며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성북동 성벽아래 심우장을 지어 살았는데, 심우장의 편액은 위창 오세창이 쓴 것이다.  

 

심우(尋牛)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는 불교의 수행법으로 사찰 대웅전 벽화로많이 그린다. 심우는 자기의 본성을 찾는다는 가르침이다. 만해가 초선총독부와 등지기 위해 북향으로 심우장을 지었다고 하나 현장을 가보면 한양도성 아래다보니 자연히 북향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만해는 민족대표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유했으나, 변절한 최린·최남선 등과는 아예 인연을 끊고 살았다이곳에서 1935년 조선일보에 <흑풍>,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후회>, 1938년 조선일보에 <박명>을 연재했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에도 1936년 신채호의 시신이 몰래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를 세웠고 다산 정약용 서세(逝世) 100주기에도 참석했다.

 

 

 

▲ 만해의 묘역...(위)2019년 4월 (아래)1979년. 바라보기에 왼쪽이 만해 오른쪽이 유씨부인     © 한철수(2019) 국가기록원(1979)

 

 

 1939712일 서울 동대문 청량사(淸凉寺)에서 만해의 회갑연이 열렸다. 이날 박광·홍명희·오세창·권동진 16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만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축하 글을 서첩에 남겼고, 만해 스님은 맨 마지막에 칠언율시(七言律詩)로 화답했다고 한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 비타협적으로 독립사상을 심은 만해는 중풍으로 시달리다 19446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만해는 일인과 친일파가 가는 홍제동보다 조선인의 몫인 미아리에서 태우라는 유언에 따라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식을 갖고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동공원에 묻혔다.

 

 

▲ 망우리공원배치도    © 경기인터넷뉴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역은 20121019일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었고, 주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선 84-2-0 으로 소유는 산림청이다. 무덤 앞에는 비석이 있는데 만해사상연구회에서 글을 지었고 글씨는 김응현의 것이다. 

 

만해는 종교를 떠나 한국인에게 사랑을 받는 근대 위인 중 한명으로 망우리공원 선생의 무덤에는 매일같이 참배객이 찾아든다.  

 

우리는 지역의 인물을 가름할 때 생거(生居우거(寓居사거(死居)를 논한다. 생거는 태어난 곳 ,우거는 머물렀던 곳, 사거는 죽어 묻힌 곳을 말한다. 생거와 우거는 잠깐에서 길게 머무는 곳이지만 우거는 영원히 머무는 곳이다. 만해의 생거인 충남 홍성, 우거인 오세암·백담사·서대문형무소·심우장, 사거인 망우리공원을 잇는 <만해문화역사벨트>를 꾸며 운영하는 것도 지자체의 몫이다.   

 

글: 한철수 구지옛생활연구소

 

<다음은 '망우리공원 삼일만세운동 3인의 명과 암(4)...박희도'>

 

[참조문헌] 한민족백과사전(이구열 글), 동북아역사넷(장세윤 글), 국가보훈처(훈터), 국가기록원(독립운동가),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청(등록문화재),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그와 나 사이를 걷다(김영식. 호메로스. 2018), 위창 오세창(이승연. 이회. 2000), 만해 한용운 평전(김삼웅. 시대의창. 2006), 한철수의 구리·남양주신여지승람(제일신문. 2004), 만해 한용운 심우장 실측보사보고서(서울시 성북구. 2009), 중앙유치원의 근대 유아교육사상 위상(논문. 김형묵)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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