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특집(2)] 망우리공원, 13도 창의군과 의병장 허위

왕산로는 허위의 길...서대문형무소 제1호 순국, 제1호 대한민국장

한철수기자 | 기사입력 2019/02/22 [07:20]

[3.1절 100주년 특집(2)] 망우리공원, 13도 창의군과 의병장 허위

왕산로는 허위의 길...서대문형무소 제1호 순국, 제1호 대한민국장

한철수기자 | 입력 : 2019/02/22 [07:20]


[3.1절특집=경기인터넷뉴스] 구리시에서 서울 중랑구로 넘어가는 망우리고개 왼쪽에 운동장이 있다
. 운동장에서 망우리공원 방향에 뾰족한 삼각탑이 있다. 소나무가 보호하듯 두르고 있는 이 탑은 <13도창의군탑>이다.

 

 

▲ 13도창의군 기념탑     © 한철수

 

 

190711월 동대문 밖 30리쯤 되는 망우리 일대에 전국에서 모인 481만 여명에 이르는 의병이 13도 창의대군소를 설립했다.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를 추대하여 서울로 진격, 일본과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였다.

 

비록 서울 진격은 못했으나 항일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1731일 동아일보사에서 망우리공원 입구에 건립한 것이다. 이 탑의 사연을 따라 가보자.

 

-을미·을사·정미의병...구한말 3대 의병 봉기

 

1910829일은 국권을 상실한 날이다. 1910년 이전 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 이들을 구한말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구한말 의병은 1895108일 명성태황후(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계기로 의병이 처음으로 봉기(蜂起)를 했다. 이는 임진왜란 처음으로  등장한 항일항쟁이다.

 

을미의병은 근왕창의(勤王倡義)라 해 왕을 지켜야 나라가 산다.’는 왕조 중심적,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으로 사상적 한계는 있었다.

 

이어 1905년 외교권을 상실한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을사협약. 을사5조약)을 반대하며 일어난 을사의병,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울분을 토하며 봉기한 정미의병이 구한말 3대 의병이다.

 

 

 

▲ 1907년 정미의병...영국의 <맥킨>지의 <한국의 비극>에 수록된 사진. 1908년에 촬영하고 위치는 경기도 양평군 양근으로 알려졌다.  ©  동아일보사(사진으로 보는 한국100년)

 

 

 

-1907년 한일신협약 고종 강제 퇴위...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

 

1907년 대한제국은 국운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시기로 고종태황제(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보낸 것이 빌미가 되어 강제로 퇴위(退位)를 당하고 순종효황제(순종)가 즉위한다. 연호도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뀐다.

 

이 시기에는 군대강제해산, 국권의 대부분을 넘기는 정미7조약으로 대변되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한다. 일제는 이를 통해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고종(高宗)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이 대한제국의 국정을 확실히 손아귀에 넣게 된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망국의 깊은 터널 속으로 들어섰다.

 

이때 13도 의병들은 반상(班常)에 관계없이, 해산된 군인 등은 연합부대인 창의군(倡義軍)을 창설하고 대일항쟁에 나선다.

 

조선8도에서 13도가 된 것은 고종이 1895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이듬해 함경도·평안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남북도로 가르는 행정개편을 했기 때문이다.

 

 

▲ 구한말 3대 의병 발상지와 의병장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13도창의군 창설...전국에서 1만명 스스로 지원

 

19079월 해산된 군인 이은찬, 이구재 등 500여명의 병력을 모아 문경에 거주하는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인영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13도 창의군의 여정은 시작된다.

 

이인영은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활동에 돌입하였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가기전 군사를 모으고, 김세영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에 비밀리에 호소문을 보냈다. 내용은 '의병부대는 애국단체이니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관동창의대장의 명의로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檄文)Manifest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인영은 원주를 거점으로 무장활동을 벌이면서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각도에 격문을 보내 양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취지는 모두 힘을 합쳐 서울을 탈환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190711월 각도의 의병부대는 양주(망우산 혹은 한강변)로 모이기로 했다. 경기도의 허위, 황해도의 권중희, 충청도의 이강년, 강원도의 민긍호, 경상도의 신돌석, 전라도의 문태수, 평안도의 방인관, 함경도의 정봉준 등 의병장들이 뜻을 모았다. (표와 지도참조)

 

 

 

창의대장

지역

의병수()

비고

(·포장)

총대장

관동 이인영

경기도

1천명

대통령장

군사장

진동 허 위

경기도

2천명

대한민국장

관동군

민긍호

강원도

2천명

대통령장

호서군

이강년

충청도

5백명

대한민국장

호남군

문태수

전라도

1백명

대통령장

교남군

박정빈

신돌석

경상도

미상

애국장

대통령장

진동군

권의희

경기황해

미상

×

관서군

방인관

평안도

80

×

관북군

정봉준

함경도

80

독립장

 

48

1만여명

 

 

 

격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방인관이 평안도에서 80여 명, 정봉준이 함경도에서 70여 명도 참여하기로 했다. 집결하기로 한 병력은 1만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신식 소총을 가진 해산 군인도 상당수 있었다.

 

-13도창의군 서울탈환작전... 허위를 중심으로 서울로 진격

 

이렇게 모인 의병들은 12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편성하고, 망우산에 모여 서울을 진격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부풀은 상황에 1908128(음력 1225) 의병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의 부고를 받게 된다.

 

나라의 불충은 어버이에 대한 불효요. 어버이에 대한 불효는 나라에 대한 불충이다. 나는 부친의 3년 상을 치른 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소탕하고 대한을 회복하겠다.”

 

이인영은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진지를 떠나 문경으로 향하였다. 13도창의군은 허위의 지휘체재로 들어갔다. 13도 의병은 분산하여 동시에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의병들의 움직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한강의 선박 운항을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배치하는 등 경계를 강화하였다. 일본은 의병들이 집결한 양주 방향으로 부대를 파견하여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고 기선을 제압할 준비를 마쳤다.

 

2018228(양력).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명이 계획대로 동대문 밖 30리 지점 지금의 청량리에 도착하자 일본군과 곧바로 교전에 들어갔다. 여러 시간 싸웠지만 기다렸던 후속 부대가 오지 않았다.

 

 

▲ 왕산 허위 의병대장     © 보훈처

 

 

가장 강력한 군세를 보였던 민긍호 이강년의 부대가 도착하지 못했고, 신돌석 부대는 배제된 상황이었다. 허위의 선발대는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시상황을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군사장(허위)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같이 함에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는지라 이에 전군에 전령하여 일제(一齊) 진군을 재촉하여 동대문 밖으로 진격함에 대군은 장사(長蛇)의 세()로 서진(徐進)케 하고, (허위)3백명을 솔()하고 선두에 서서 문 밖 30리 지점에 진군하여 전군의 내회(來會)를 기다려 일거에 경성을 공입(攻入)하기로 계획하였더니 전군의 내집(來集)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이 졸박(卒迫)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後援)이 부지(不至)하므로 그대로 퇴진하였더라.”-대한매일신보 기사

 

이 진격작전은 비록 실패를 했으나 을사늑약 이후 다시 뭉친 항일 의병들의 피어린 항쟁으로 대일항쟁의 정점을 찍는다. 의병들의 투쟁은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해산되고 간도 등 국외로 나가 교민사회를 근거지로 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게 된다.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순국...왕산로(신설동~청량리)는 허위의 길

 

이렇게 서울 탈환 작전을 실패한 허위의 주력부대는 속속 임진강 유역에다시모여 1907년 이래 이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의병과 다른 곳에서 온 부대와 연합부대를 결성하고 총대장에 오른다. 허위는 군량미 확보는 물론 부대를 군율을 정하는 등 의병의 정예화에 최선을 다하였다.

 

19084월. 13도의 진영에 통문(通文)을 보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국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그즈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하는 것이 아니다. 차마 왜적과 함께 살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허위는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던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연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어 외부대신 자리를 주겠노라 유인을 하기도 했다. 휘하의 군사들이 심부름 온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보낸 사람이 죽일 사람이지,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하며 되돌려 보냈다.

 

1908611일 천둥이 치고 비가 크게 내리는 날. 양평 유동(양근리로 추정) 골짜기에서 헌병 40명이 피신처를 포위하자 처연히 잡혔다.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로 이송되었는데 일본인 아카시(明石) 소장(少將)이 그의 탁월한 경륜, 한학과 역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을 알고 모든 백성들의 사표라 해서 마음속으로 공경했다고 한다. 이때 아카시와 대화하다가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오.”

 

아카시는 허위에 대한 공경심은 날로 깊어만 갔다. 선생의 생명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19081021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교수형)가 되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제1호로 추서하였다.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 밖 신설동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도로명이 <왕산로>. 이 길은 그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고향 구미시에는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왕산허위선생기념관과 유허 비문(경북 구미시)     © 왕산허위선생기념관

 

 

-허위의 가족 모두 ... 해외를 떠돌며 독립운동에 몸 담아

 

허위(許蔿) 철종6(1855) 경북 선산에서 아버지 허조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가 왕산(旺山)이다.1895년 민비시해사건 후부터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했다. 그 후 관직을 맡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등을 거쳐 1904년에는 오늘날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었다. 재판장 시절에는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소송을 처리해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후 의병활동에 전념했다.

 

선생의 맏형 허훈은 약 75만평의 논밭을 팔아 허위의 항일투쟁에 군자금을 댔고, 둘째형 허신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형 허겸은 동생과 함께 의병투쟁을 했다.

 

일제에 의병투쟁으로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왕산의 가족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졌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 허위의 후손들 예가 종종 인용된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위원회가 주관한 망우리공원의 근현대 인물의 무덤을 찾아 문제를 푸는 청소년프로그램 <도전! 러닝맨> 이 지난 2년간 이어졌다.

 

 

 

▲ 허위 선생의 유족이 지난해(2018년) 광복절을 맞아 13도창의군 탑에서 분향과 헌화하고 찍은 기념사진.     ©한철수

 

 

 

2018년 광복절 특집을 진행 할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그의 증손녀들이 13도창의군 탑에서 인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들은 허위 선생의 손녀 허로자의 딸들이다. 청소년들에게 그들을 소개했고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의 명성과는 달리 오랜 시간 무관심 속에 살던 그들은 원망보다는 조국을 사랑하고 할아버지를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모두 숙연해 졌던 모습이 떠오른다.

  

글을 마치며, 왕산 선생은 빼고는 구한말 의병을 말할 수 없다. 선생의 의병활동은 최초의 독립운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후 의병들은 한 해에 2천번에 가까운 교전을 벌였으며 의병의 규모가 10만명을 육박했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자 의병이 아닌 독립군이 되는 끈기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국땅에서 처절한 삶을 살다간 그 후손들에게 그 많은 시간과 희생을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올해는 기미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국이 떠들썩하다. 난 그저 선열의 고귀한 얼을 되새길 뿐이다.

 

<글쓴이/구지옛생활연구소 한철수>

 

참고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보훈청 홈페이지, 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중연), 위키백과, 그와 나 사이를 걷다(김영식. 2018. 호메로스), 국가지명위원회 홈페이지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동아일보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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