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특집(1)] 망우리공원에서 만난 유관순 열사의 숨결

망우리공원, 독립운동가 예술인 언론인 등 50여명이 누워있어

한철수기자 | 기사입력 2019/02/19 [22:25]

[3.1절 100주년 특집(1)] 망우리공원에서 만난 유관순 열사의 숨결

망우리공원, 독립운동가 예술인 언론인 등 50여명이 누워있어

한철수기자 | 입력 : 2019/02/19 [22:25]

[3.1절특집=경기인터넷뉴스] 18일 구리지역아동보호센터 어린이들과 모처럼 망우리공원에 올랐다. 2학년부터 6학년까지 장난꾸러기들과 이곳에 묻힌 애국지사·예술가·언론인·의료인·국어학자·사회운동가 등 근현대를 이끈 기라성 같은 50여명의 인물을 게시한 일명 <망우리공원 인물벽>을 둘러보게 하고는 아는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17명 어린이 대부분 소파 방정환을 꼽았다. 당연한 결과다. 이어 몇몇 어린이가 안창호, 한용운을 선택했고 한 어린이가 조봉암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 벽에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있었다면 아이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 삼일절의 상징 수인번호 371번 유관순 열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를 지나 산책로 왼쪽으로 500m를 지나면 <이태원합장비><유관순열사>가 추가 된 표지판이 있다. 10m 쯤 아래로 내려가면 <이태원묘지무연고분묘합장비>라는 일본식 비석이 서있고 네모의 무덤이 하나있다. <유관순열사>가 추가된 것은 지난해 20189월 이후이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

 

▲   2018년 9월 7일 기념비를 세운 후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추가 된 표지판    © 한철수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펼쳐...눈앞에서 당한 부모의 죽음

 

191931일 기미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 유관순은 <5인결사대>를 조직하고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다니며 서울의 독립만세시위를 설명하고 만세운동을 마을지도자 조인원, 김구응 등과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 등을 규합했다.

 

마침내 41(음력 31) 아우내 장터에서 장날을 기해 수 천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봉기(蜂起)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들은 주재소를 향하여 오는 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눈앞에서 부모를 잃었고, 19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 망우리공원 이태원합장묘와 천안 병천면 탑원리 가묘인 초혼묘     © 한철수

 

 

유관순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를 받았으나 이를 불복해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일제법률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을 항의했고, 우리나라의 침략을 규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나는 한국(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일제)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경성복십법원에서 항소심 중 일갈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주도한 당찬 소녀...18세에 산화하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3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의 함성이 형무소 담장 밖으로 울려 퍼졌다.

 

이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될 지경이 되자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     © 국가기록원

 

 

1920428일 영친왕(英親王. 의민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해 특사령으로 형기도 16개월로 줄어들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928일 오전 820, 꽃다운 나이 18세에 옥중산화(獄中散花)한 것이다.  

 

유관순의 참사 소식을 이틀 만에 접한 이화학당 월터(Miss Jeanette Walter) 교장은 시신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만행을 숨기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 이에 유관순의 학살을 해외 언론에 알리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자 '장례를 조용히 치러야 한다.' 는 조건으로 시신을 내 놓았다.

 

숨을 거둔지 보름도 넘어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돌아왔다.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많은 학생들의 통곡 속에 조촐한 장례가 치러졌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 2018년 9월 7일 표지비를 세운 유관순 기념회 관계자들     © 유관순연구소

  

 

-사라진 무덤...그리고 망우리 이태원합장묘

 

1930년대 일제가 이 공동묘지를 군부지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유관순묘는 무연고로 처리됐다. 50여년 뒤 고향에 <초혼묘>라는 가묘늘 만들었다. 열사가 뭍혔던 옛 이태원공동묘지 꼭대기에는 이슬람교회가 서있다.

 

이태원공동묘지는 군부대와 주거지 확장을 위해 새로이 만든 망우리와 미아리공동묘지로 이장을 추진한다. 당시 상황을 소개한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낸다.  

 

일제는 이태원을 주택지로 만들기 위해 1935년부터 이장을 추진하여 193648일까지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을 추진하였다. 유연고자 묘는 4,778기에 불과하고 나머지 무연고자 28,000여기는 경성부 위생과에서 모두 화장을 해 망우리공원에 합장을 했다. 49일 오후 2시 그 영혼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위령제를 지냈다. <동아일보 1937627>

 

이태원공동묘지의 4천 8백여기의 유연고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2만 8천여기는 화장을 당해 한몸이 되어 망우리로 왔다. 유관순 열사 역시 무덤의 위치도 몰랐고 무연고자가 되어 망우리공원 이태원합장묘에 함께 묻혔다망우리공원의 이 합장묘는 유관순 열사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유관순 열사는 3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 '영원한 누나 또는 언니'로 남았다. 그는 숨을 거둔지 20년이 지난 1951년에 순국열사로 인정됐고 그 후로부터 또 10년 뒤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 유관순 노래 강소천 작사/이운영 작곡     © 경기인터넷뉴스

 

 

<그와 나사이를 걷다>의 김영식 작가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위원회 그리고 서울시가 이곳의  인물을 발굴하고 이태원합장묘의 사연을 알렸다.  

 

유관순기념사업회 등 관련단체에서는 이를 알고 20189711<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워 그 넋을 위로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가 1920년 순국하고 1936년까지 이태원공동묘지에 있다가 193648일 2만여명의 넋과 함께 망우리로 온 것이다. 유관순 열사의 숭고한 뜻은 이화여고, 아우내장터, 서대문형무소, 이태원에 이어 망우리까지 한 고리로 연결됐다. 

 

 

▲ 망우리공원 근현대 인불이 누워있는 망우리공원 배치도. 네모안은 독립유공자의 무덤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삼일절 100주년을 앞두고 <유관순 누나>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분명 누나였는데 여자 친구들의 고무줄놀이가 생각난다. 이 노랫말을 쓴 강소천 선생은 <이태원합장묘> 건너편 구리시 교문동 딸기원 마을에 묻혀있다. 참 사연은 깊다.  그 노래를 읊조려 본다.

 

https://youtu.be/cXVABYbZ7H8 (유관순/유튜브)

 

<기미독립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망우리공원에 묻힌 독립유공자와 예술인, 언론인, 의료인, 국어학자, 사회운동가 등을 분야로 묶어 나누고자 한다. [다음이야기는 '13도창의군과 기미년 33인'] 

 

<글쓴이: 구지옛생활연구소 한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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